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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밀양이씨(異)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밀양이씨)

 

본관(本貫): 밀양(密陽)

시조(始祖): 이모심(異牟尋)

유래(由來):

 

이씨(異氏)는 중국 당나라 덕종(德宗: 9대 왕, 재위기간 780 804) 때 운남왕(雲南王) 이모심(異牟尋)의 후손으로 전()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이씨(異氏)의 본관(本貫)은 밀양(密陽) 외에 동성(童城 : 통진지방청양(靑陽남원(南原)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시조(始祖)와 연원(淵源)에 대한 설명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밀양 이씨(密陽異氏)는 고려 현종(顯宗) 때 좌복야를 지낸 이응보(異膺甫)와 그의 후손으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한 이유충(異惟忠), 문종(文宗) 때 형부상서(刑部尙書)와 안서 도호부사(安西都護府使)를 지낸 이선정(異善貞) 등이 대표적인 인물(人物)로 전해지고 있다.

 

異斯夫(이사부)

505년(지증왕 6) 신라에서는 군현제가 실시되어 최초로 실직주()가 설치되었다. 이 때 이사부는 그 곳의 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512년에는 우산국(于山國 : 지금의 울릉도)을 점령하였다. 원래 우산국은 지리적인 이유로 신라에 귀복하지 않고 있었으며, 주민들이 사나워서 힘으로는 정복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이사부는 계교로써 항복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가득 싣고 그 나라 해안을 내왕하면서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위협하니, 그들은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541년(진흥왕 2)병부령()이 되었다. 당시 병부령은 단순한 병부의 책임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등·시중을 겸할 수 있는 최고 요직의 하나였다. 그 뒤, 562년(진흥왕 23)까지 정치·군사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545년 왕에게 국사편찬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왕은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550년 1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함락하고,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하는 등 양국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 틈을 타, 이사부는 이 두 곳을 공략하여 점령한 뒤, 성을 증축하고 1,000명의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어 금현성 탈환을 위해 재차 침입한 고구려의 군대를 다시 격파하였다. 근래에 발견된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에 의하면, 549년(진흥왕 10) 전후에 이찬이사부는 파진찬두미()와 아찬비차부(比次夫)·무력( : 김유신의 할아버지) 등을 이끌고 한강 상류지방을 경략하여 신라 영토를 크게 넓혔다.

562년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왕명을 받고 출정하였다. 이때에 사다함(斯多含)이 5,000 기병을 이끌고 전단문()에 치달아 백기를 세우니 성중의 모든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를 본 이사부가 돌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대가야를 멸망시켜 낙동강 하류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이들과 연결된 왜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 이 후, 이사부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진흥왕의 재위 20년대 말에 세워진 순수비를 보아도 이사부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그를 뒤이어 크게 활약한 거칠부가 가장 먼저 나오고 있다. 이를 보면, 그가 진흥왕의 재위 20년대 중·후반의 어느 때에 은퇴했거나 사망한 것이 아닐까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異斯夫]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밀양 이씨(密陽異氏)는 남한(南韓)에 총 91가구, 3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異萬光(이만광) 본관: 密陽(밀양)

 

반역자의 교훈을 일깨우는 만광지(萬光池)

 

백제의 말엽, 사비성(泗泌城)시대, 그때 동문에서 장안에 들어오던 길과 웅진에서 석문(지금의 석목리)을 거쳐 들어오는 길이 서로 마주 치는 곳에 이만광(異萬光)이라는 점을 잘 치는 복술가(卜術家)가 살고 있었다.

 

만광은 어려서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생도 많았으나, 머리가 명석하여 일찍 중국에 건너가서 복술을 배우고 돌아오는 비상한 제주도 지니고 있었다.

만광의 복술은 너무나도 잘 맞았다. 신기하게 여긴 장안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찾아들기 시작하여 만광의 집은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부귀(富貴)의 길을 찾기 위하여 또는 며느리를, 아들을, 손자를 얻기 위하여 아니면 실물한 물건을 찾기 위해서까지 많은 남녀노소가 만광의 복술을 믿고 찾아왔는데 모두가 백발백중이었다.

그 신기에 놀란 장안 사람들은 만광이를 하늘에서 내린 신인(神人)이라고 까지 부르기도 했었다.

 

만광이는 불과 수년 만에 복채로 치부하여 수백평의 집터에다 고래 등 같은 으리으리한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

장안에서는 자연이 만광이라면 삼척동자도 알 정도로 유명하여졌다.

이때가 백제의 국운이 다되던 의자왕 19(659)인데, 도성 안팎에서는 불길한 징조가 자꾸 발생하고 있었다.

 

어느 겨울에는 여우들이 떼를 지어 궁중으로 들어오고 그중 한 마리의 흰 여우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와 앉는가 하면 봄이 되자 사비하(泗沘河)에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그 길이가 세길이나 되었다.

여름이 되자, 한 여자의 시체가 강의 상류에서 떠내려 왔는데 물에 퉁퉁분 그 시체의 길이는 놀라웁게도 18척이나 되어 장안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가을에 들어서니 궁중의 괴목이 우는데 그 소리는 마치 사람의 곡성과도 같았고, 밤이 되면 귀신이 궁성의 남쪽 길에서 울기도 했다.

 

백제가 망하는 의자왕 20년으로 해가 바뀌자 이런 불길한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2월에는 서울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서해안에 작은 물고기가 무수히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능히 다 먹지 못하였고, 사비하(泗沘河) 물의 붉기가 핏빛과 같았다.

4월에는 두꺼비들 수만 마리가 나무위에 모여들었고, 서울 사람들 중에는 까닭 없이 죽어 쓸어 진 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다.

 

신라와 당이 백제의 침공 준비를 거의 마친 5월에 들어서니 이런 괴변은 더욱 심해졌다. 풍우가 사납게 일어나고, 천왕사(天王寺)와 도양사(道讓寺) 두절의 탑이 진동하고, 또 백석사(白石寺)의 강당이 진동하고, 검은 구름이 용과 같이 일어나서 동서의 공중에서 서로 싸웠다.

 

나당연합군이 출동태세에 들어간 6월이 되자 왕흥사(王興寺)의 중들은 배가 큰 물줄기를 따라 절문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은 것을 보았고, 개 모양을 한 들 사슴 한 마리가 서쪽 사비하 언덕에 와서 궁성을 향하여 짖고 어디론가 살아졌는데, 서울의 많은 개들이 길 위에 모여, 혹은 짖고, 혹은 울다가 좀 뒤에 헤어졌다.

 

그런데 나당 연합군이 출동령을 내렸을 무렵에는 구중궁궐 속에서 태평의 꿈을 꾸던 의자왕의 주변에도 이런 불길한 괴변이 발생하게 되었다.

한 귀신이 궁중으로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하고 소리 질렀고 곧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궁녀들과 이것을 가까이에서 본 의자왕은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땅을 파게 하니 깊이 석자쯤 들어가서 한 거북이가 나왔는데 살펴보니 그 등에는 百濟同月論 新羅如月新즉 백제는 둥근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는 것 이었다.

 

의자왕은 곧 유명한 복술가 이만광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만광은 행인지 불행인지 저술과 병의 휴양을 위하여 수개월 전부터 계룡산에 들어가고 성내에는 부재중이었다. 왕은 하는 수 없이 만광의 제자인 한 무당을 불러 그 글의 뜻을 풀어보게 하였다.

 

무당은 올바르게 달이 둥글면 찬 것으로 차면 이지러지고, 달이 새로우면 차지 않은 것으로 차지 않은 달은 점점 차게 되는 것으로 풀이됩니다.라고 이 만광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그대로 풀이하여 여쭈었다.

 

의자왕은 만면에 노기를 띠며 그 무당을 참수에 처해 버렸다. 이 의자왕의 노기를 풀려고 신하는 다른 무당을 불러들었다. 신하는 무당에게 왕의 노여움의 원인을 귀띔 해주었다. 누가 사서 목숨을 잃으려는 자 있겠는가.

무당은 의자왕 앞에 나가 둥근달은 왕성한 것이고 새달은 쇠미한 것이니 이 뜻은 백제는 성하고 신라는 쇠미하다는 뜻이옵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은 노여움을 풀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기뻐하고 그 무당에게 한 아름의 상을 안겨 돌려보냈다.

이런 잘못은 의자왕, 신하, 무당, 그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잘못이라기보다는 잘한 자 그 어느 누구도 없음이 분명하다. 후회한들 무슨 소용있으리요. 이때 이미 신라왕 김춘추(金春秋=武烈王)는 출격명령을 내렸다.

 

김유신(金庾信)5만 정군은 노도와 같이 국경을 돌파하여 백제의 요새 탄현(炭峴)에 맹공을 가하였고, 당나라 고종(高宗)의 명에 의하여 본토를 출발 하였던 소정방(蘇定方)이가 이끌고 온 13만 대군은 백강 하류에서 물밀듯이 쳐들어 왔다.

당시 중국 대륙을 제패하고 신흥의 의욕에 찬 당의 국력은 오늘의 미국과 같은 대국이요, 신라는 국력을 총동원한 것이었으니 백제는 복배 양면의 협공에 견디어 날수가 없었다.

도성은 사비성의 동남방 보루(파진산)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끝내 염창이 있는 마지막 보루 나성의 일각이 돌파되어 버렸다.

 

사비성이 나당군의 총공격으로 함락 직전에 이르자 의자왕은 야음을 틈타 태자 효()를 데리고 왕성을 몰래 빠져나가 웅진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사비성이 완전히 함락되고 이어 웅진성에도 위험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자 의자왕은 다시 태자와 수명의 심복 신하만을 데리고 신원사의 뒷산인 험한 계룡산중의 암자에 숨었다.

한편 사비성과 웅진성을 점령한 신라의 김유신과 당장 소정방은 의자왕을 사로잡지 못하고 그 항복을 못 받았으니 당황했다. 이대로 두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혈안이 되어 의자왕의 행방을 찾느라 온 군사를 백방에 풀었다. 그러나 그 탐색은 모두가 허사였다. 이렇게 되자 적장 김유신은 그 복술로 유명한 이만광을 막사에 불러들여 너의 왕은 어디에 숨었는가. 당장에 알아 맞추어 내라고 호령했다.

 

이만광은

어찌 신하된 도리로 그와 같은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죽여주십시오.하고 거절했다. 노발대발한 김유신은 시퍼런 칼을 쓱 뽑았다. 당장에 이만광의 목이 뚝 떨어 질것만 같았다.

 

그러나 김유신은 이 만광을 죽이지는 아니했다. 아니 죽음보다 더 괴로운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만광은 몇 번이나 피를 토하고 몇 번이나 실신했다. 그들은 이 만광이 실신하면 물을 퍼붓고 소생하면 또 고문을 가했다. 그러기를 며칠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질 듯한 고통은 도저히 참을 길이 없었다.

 

이만광은 끝내 정신 나간 상태로 소정방의 요구를 들어, 점을 풀어 의자왕이 현재 동방향 큰 산악의 굴속에 은신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말았다.

 

김유신은 즉시로 기마병을 급파하였다. 그들은 계룡산의 암자 뒤에 있는 큰 바위 굴속에 숨어있던 의자왕과 태자 효를 찾아내어 사비성의 김유신 진영에 연행했다.

백제의 굴욕의 날인 82일 김유신과 소정방은 전승의 잔치를 벌였다.

신라의 무열왕(武烈王)과 소정방 등 적장들은 높은 단상에 오르고 의자왕은 그 단하에 끌려와 앉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국의 왕이었던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잔을 부어 올리게 하였다.

 

이것을 본 백제의 좌평등 군신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 없었다. 이 굴욕을 당하고, 백제의 사직은 무너졌다.

 

당장 소정방(蘇定方)이 의자왕 및 태자 효를 위시하여 대신과 장병들 그리고 만여 명의 백성을 포로로 하여 당경으로 떠난 뒤 백제 유민들은 광복을 위하여 일제히 봉기했다.

그리고 아직 당군의 점령 하에 있던 사비성 안에서도 분기한 백성들은 이 만광의 집을 습격했다.

 

이만광은 이미 이때, 조국을 배반한 마음의 고통과 심한 고문에서 받은 신체적 후유증이 악화되여 죽은 뒤였었다. 백성들은 분을 못 이겨 고래 등과 같은 이만광의 기와집을 때려 부수고, 불 지르고, 그 집터마저 깊이 파헤쳐버렸다.

 

조국을 배신하고 나라의 치욕을 불러들인 자에 대한 복수였다. 깊이 푹 패인 이만광의 집터는 그 뒤 빗물이 고이어 못으로 변하였고 개구리의 서식처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백제의 한이 맺힌 여름이 오면 개구리들은 이만광의 이름을 불러 맹꽁이! 맹꽁!하고 천년을 내려 조롱하여 오고 있는 것이다.

                                                                             <부여군지 82. 3.15.>

 

 

     신라(新羅)에 필요한 인물  異斯夫(이사부)

 

 

異斯夫(이사부)는 왕족인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최고 귀족안 진골(直骨)의 옴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의 고조부는 김씨의 왕권을 확립 한 奈勿王(내물왕)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성기던 법흥왕과는 촌수 가 멀기는 하나 형제 뻘이 된다.

그는 지증왕, 법흥왕, 그러고 진흥왕의 3대에 걸쳐서 활약한 당시의 매표적안 장군이었다.

 

그러면 이사부가 생을 누리던 시내는 어떤 시대였으며 그 시대 가 異斯夫(이사부)에게 바라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고구려가 만주의 일부와 반도의 북반부률 차지하고 중국의 강 대한 세력과 서로 겨루어 나가고 있을 때 신라는 아직 냐라의 기틀이 서 있지 않았다.

 

백제가 한강 유역의 반도 심장부률 차지하고 북쪽의 강국 고구려와 대항하여 싸울 해에도 마찬가지였다. 신라는 남쪽 바다 건너로부터 침입해 오는 ()의 세력을 혼자의 힘으로는 당해낼 수조 차 없었다.

 

4세기 마지막 무렵에 이르기까지도 신라는 아직 국가의 조직을 갖추지 못하였으며, 동양의 국제무대에 나설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려나 4세기 말에 奈勿王(내물왕)이 입금의 자리에 오른 후부터 신라는 일단의 진보를 하였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임금은 눈장<정청 (政廳)의 주석창(主席長)>을 의미하는 마렵간의 칭호를 쓰게 되었다.

 

또한 중국 천진에 사신을 보내 나라의 정세가 달라졌음을 알렸다. 또 고구려의 힘을 빌리어 성가진 왜의 세력을 몰아내었다. 그러나 아직 신라는 고구려에 의지하여서만 그 지위를 유지해 나칼 수 있는 약소국이었다.

 

고주려가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고 남하정책을 강행하여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고 대신 반도의 중앙부를 차치하고서부터 전국의 관계는 일변하였다.

 

백제는 남하하는 고구려의 세력에 대항하여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의 옛땅을 다시 찾으려고 신라와 손을 잡을 펄요가 생겼다. 그리고 신라는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의 간섭을 물리치려 하였다. 이른바 나제동맹(羅濟同盟)은 이려하여 맺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틈바구니에서 그 독자적인 지위를 능히 견지해 나갈 수 있는 하냐의 강국으로서 나서게 된 것 이다.

 

6세기에 들어서면서 임금인 판지증왕은 냐라의 이름을 정식으 로 新羅(신라)라고 나라 안팎에 선포하고 중국식의 왕()이 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대외적인 영토 확장도 착착 진행되었다.

 

다음 염금인 법흥왕 해에는 그 실천의 도가 더욱 빨라졌다. 안으로는 나라의 체제가 갖추어지기 시작하였고 국가 질서의 정신 적인 기반으로서 불교를 공인하였다.

 

建元(건원)이라는 연호를 세워 대외적인 체면을 세웠다.

또 밖으로는 더 많은 영토를 확장하였는데 난동강 하류의 본가야(김해)를 합친 것은 그 중 가장 큰 것이었다.

 

다음 임금인 진흥왕 때에는 비약적인 대외 발전을 이룩하였으니 그는 고구려의 廣開土王(광개토왕), 백제의 근초고헝에 비걸 수 있는 신라의 위대한 임금이었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반도의 심장부을 점유하게 되자 중국과 통할 수 있는 편리한 교통로를 얻게 되었다.

 

동해안으로 붙어 올라가는 힘은 함흥 평야 까지를 완전히 제압하고 남으로든 대가야(고령)를 쳐서 낙동강의 온 유역을 점령한 것은 진흥왕 일대의 위업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네 개의 순덕비는 그 기념물이다.

 

숱한 고난을 무릅쓰고 안으로 국가의 체제를 갖추는 동시에 밖 으로 국제적언 진출을 꾀하던 그 당시의 신라가 필요로 한 것은 슬기롭고도 용감한 장군이요, 정치가였다.

 

신라의 통치의 중심이 되는 진골의 몸으로 태어난 異斯夫(이사부)는 그러한 시대에 부응하는 가장 적절한 일물이 었다.

 

<출전 명장들의 일화: 며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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